도쿠가와 나리아키 - 가이라쿠엔 과 고도칸

가이라쿠엔 과 고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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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나리아키

미토 지방 제9대 영주 도쿠가와 나리아키(1800-1860)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1800년 제7대 영주 하루토시의 셋째 아들로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태어나 30세 때 제9대 영주가 되었습니다.
나리아키는 취임 후 곧바로 영지 내의 정치 개혁에 착수하여 검소함의 철저화, 군정 개혁과 오이토리가리(군사연습) 실시(아래 그림), 영지 내의 측량조사, 고도칸과 가이라쿠엔 조성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


오이토리가리행렬도(부분)

오이토리가리행렬도(부분) 이바라키현립역사관 소장

1844년 나리아키는 정치 개혁이 지나쳤다는 이유로 중앙 정부인 에도막부로부터 근신처분을 받았지만, 1858년 페리가 거느리는 미군함대가 일본에 오자 해군참모로 막부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후 쇼군 후계자 문제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다시 처분을 받았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게 된 나리아키는 1860년 근신 중이었던 미토성 내에서 급사하였습니다. 향년 61세였습니다.

가이라쿠엔과 고도칸 -나리아키의 구상-

일장일이

가이라쿠엔과 고도칸은 제9대 영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창설하였습니다.
가이라쿠엔 창설에 대하여 기록된〈가이라쿠엔키〉에는 ‘일장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장일이’란 공자의 《예기》에 나오는 말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너그러이 즐기는 여유를 주면서 임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무수업의 터전인 고도칸에 대하여 가이라쿠엔은 훈련하는 사이 잠시 심신의 피로를 풀 수 있는, 고도칸과 한쌍을 이루는 시설로 구상된 곳입니다.

매화를 사랑한 나리아키

매화는 봄에 가장 먼저 청초한 꽃을 피우며, 열매는 소금에 절여 군대에서 또는 흉년 때의 구황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실용성을 중요시한 나리아키는 매화를 사랑하고 영지 내에 널리 심으라고 권장하였습니다.

미토의 6명목

꽃의 형태, 향기, 색등이 특별히 우수한 것을 6 품종 선택하여 쇼와 6년(1931)에 미토의 6명목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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